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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의 중세시대 역사

알꼴요정 2023. 3. 29.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포도 재배와 와인 산업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으나, 미사에 필요한 포도주를 조달하기 위하여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명맥을 유지하였고, 곧 빠르게 부흥하였다.

오히려 수도원과 성당의 끊임없는 개량 덕분에 퀄리티 면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능가하는 발전을 이룬 시기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풍부한 노동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가능하였으며,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여 관련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수도원에서는 대량으로 와인을 생산하여 의식에 필요한 분량을 제외한 나머지를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포도주 판매에 이윤이 남게 되자 과학적인 방법들을 연구 및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진 와인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수도원에서 와인이 제조되고 있다. 와인은 중세 유럽에서는 남유럽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북서유럽에서는 귀족 집안조차도 평소에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와인은 보통 귀한 손님이 방문할 경우에 내는 고급 만찬의 일부였으며, '귀한 손님을 따라온 기사들'의 경우는 대부분 그 식사에서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계급과 중요도에 따라서 특별한 자에게만 차별적으로 내놓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보르도 등 남유럽에서는 와인을 물처럼 마실 수 있었다. 평민들도 값싼 저급 와인들은 일반적인 음료수로 마셨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서 중저가 와인이 생수보다 더 저렴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프랑스는 12세기 이래로 보르도 지역과 부르고뉴에 포도 플렌테이션이 형성되어서 영국, 네덜란드 등 지역에 대규모로 수출했다. 프랑스 와인의 명성이 높은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으며, 반면 스페인과 이탈리아 와인은 생산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받는 것은 국제 수출보다는 자국에서 서민들과 부자들을 가리지 않고 마신 역사적 배경이 관련되어 있다. 유럽의 와인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까지도 전해지긴 했고, 꽤 고급품 대접을 받았긴 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수입산이어서 매우 비쌌고, 기존의 곡주의 영향력이 강해서 제조법의 갈피를 못 잡았기 때문이다. 후한대에는 포도주를 뇌물로 바쳐서 주자사가 된 인물이 있어서 후대의 소동파까지 시로 조롱했는데, 이건 포도주가 뇌물이 될 정도로 희귀성을 만족시켰다는 이야기.

이백을 포함한 시인들의 시들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당 대 이후의 포도주 제조 시도에는 포도와 쌀을 섞어서 만들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즉 포도로만 만든 포도주는 모조리 서역 수입산. 이백의 시에도 포도주에 맞는 술잔은 유리잔이라고 하고 있는데, 유리 역시 대표적인 수입 사치품이었다.

결국 고급품의 이미지가 확고해져서 이후 포도만으로 발효시켜 마신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도 곡주처럼 그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했다.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던 중앙아시아권과 접한 중국이 이 지경이니 한반도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는 상황. 일본의 경우 전국 시대부터 남만인(포르투갈인)이나 홍모인(네덜란드인) 등 서양에서 온 상인이나 선교사들에게서 정말로 어쩌다 입수하여 귀한 것을 조금씩 마시는 정도였으나 사실상 과시용 사치품이나 다름없었고, 역시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다.

 

 수질 때문에 와인을 마셨다?

한편, 유럽은 지반에 석회가 포함된 지역이 많아서 물에 석회가 섞여 뿌옇게 되고 당연히 마시지 못하는 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데다 각종 오물로 인해 강물이 더러워지는 일이 빈번했기에 그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는, 전설과도 같이 널리 퍼진 속설이 있다.

그렇기에 당시 중세에서는 와인과 맥주를 물을 대신해서 마시기 시작했다고 알려졌으며, 이것에 대해 심지어 서양권에서조차 오랫동안 큰 이의가 제기되지 않은 채 학자들까지도 인용해 오곤 했다.

고대 로마 병사의 경우 식수를 찾지 못하는 경우나 비상시를 대비해서 '포스카(posca)'라고 하는 식초 수준의 묽은 와인을 상비하고 다녔는데 이것이 와전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최근의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중세 사람들이 맥주를 식사와 함께 항상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목적은 물 대신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단 맛을 위해서나, 혹은 식사의 일부로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맥주를 괜히 '액체 빵'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니다. 중세 수도원의 경우에도 금식기에 식사 대신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서 맥주를 마셨다. 반면 물을 마셨다는 기록은 계속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7세기 로마 제국의 의사인 Aegina의 Paul은 '물은 모든 종류의 식이요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가장 좋은 물은 맛과 향이 없고 눈으로 보기에 맑으며 마실 때 무엇보다도 기쁨을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The Regimen Sanitatis Salerni에서는 갈증에 물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세의 많은 수도원들이 양질의 수원을 도시에 보급하기 위해 애썼으며 이것은 도시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했다.

물론 수질, 특히 오염 때문에 맥주 등을 마셨다는 말은 양조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듣는다면 "이게 아닌데?"라고 갸웃거릴 만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술을 빚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물이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잡균을 통한 오염이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에일 양조를 할 때 몰트를 끓이지 않았다. 세균에 오염된 물로 맥주를 빚을 경우, 세균과 효모가 싸우면서 발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산패할 수 있다. 술이 빚어지더라도 '오염된 술'이 나오지 깨끗한 술이 나오지는 못한다.

실제로 중세의 양조장에서 양질의 수원이나 우물을 독점하려고 하다가 문제가 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중세에 빚어진 에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일주일이면 마실 수 없게 되었고, 여름의 경우 2~3일만 지나도 마실 수 없었다.'라는 말들이 나온다. 에일이 세균을 이기는 작용이 있었다면 이렇게 빨리 산패하여 마시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 시대에는 세균의 개념뿐만 아니라, 왜 술이 산패하는지 그 원인을 추측하지도 못했다.

18세기에조차 항해를 하면서 배에 럼주를 싣고서 물에 섞은 이유가 소독의 의미보다는 배에서 오랫동안 묵어서 악취가 나는 물의 냄새를 덮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식수를 수시로 보충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물이 상하고 난 다음을 대비해 술을 예비 음료로 두고는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깨끗한 맹물이 아주 없어 술을 대신 마셨다는 것은 틀리다. 수질 문제 중 석회질에 대한 부분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국내의 정제되지 않은 인터넷 블로그 등의 출처를 보면 중세 맥주와 석회수를 관련시켜 쓴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영어권의 주류 관련 서적에는 '중세 수질에 대한 전설'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오염 이야기를 하지 석회질 문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특히 맥주와 관련해서 석회질이 언급되는 가장 많은 경우는 석회질이 페일 에일 등을 양조할 때 오히려 '좋아서' 현대에도 일부러 물에 석회를 섞는다는 등의 이야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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