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 와인 역사와 특징 및 종류
귀부(貴腐)는 글자 그대로 '고귀한 썩음'으로, 영어의 noble rot를 한자어로 쓴 것이다. 유명한 디저트 와인 생산법의 하나이며, 사실상 제일 오래된 디저트 와인 생산법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최고가 와인 중 하나인 샤또 디켐(Château d'Yquem)이 이 귀부 방식으로 생산된다. 독일의 트로켄베어렌아우스레제와 헝가리의 토카이 그리고 프랑스의 소테른이 3대 귀부와인으로 손꼽힌다.
상세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회색 곰팡이가 귀부 와인 양조의 핵심 역할을 한다.
이 곰팡이가 포도에 피게 되면 포도알 껍질의 왁스질을 파괴하고 미세한 구멍을 낸다. 더운 낮동안 이 구멍으로 수분이 증발하여 포도알 내부의 과즙이 농축된다. 귀부균은 당분과 유기산을 일부 소모하지만, 그 이상으로 수분이 증발하므로 결과적으로 과즙의 성분은 평소의 몇 배로 농축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쯤 건포도가 된 포도알을 수확하여 압착, 농축 과즙을 뽑아내 와인으로 양조하면 꿀처럼 달콤한 단 맛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또한 귀부균에 의해 과즙 구성 물질 조성에 변화가 생겨 일반 와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다. 귀부 와인의 향은 망고, 파인애플, 리치 등의 열대 과일향, 꿀, 버터스카치향으로 흔히 묘사된다.
역사
최초로 귀부 와인이 만들어진 곳은 헝가리지만 본격적으로 귀부 와인이 생산된 곳은 독일이다. 중세 독일에서는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만 와인용 포도의 수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독일 라인가우(Rheingau) 지역에 있는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Schloss Johannisberg)라는 와이너리에서 포도 수확을 허락받기 위해 주교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중간에 사정이 생겨 무려 3주 후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수확시기가 한참이나 지난 포도 알맹이들은 이미 말라비틀어지고 곰팡이로 잔뜩 뒤덮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말라비틀어진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는데, 의외로 그 와인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와인을 독일어로 슈팻레제(Spätlese)라 불렀는데, 이는 '늦수확'(Late harvest)이라는 뜻이다.
특징
높은 당도
디저트 와인 카테고리기 때문에 당도가 높아 마시기 쉽다고는 하지만 귀부 와인에도 당도의 레벨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그랑 크뤼급의 소테르느는 잔류 당분(residual sugar) 함량이 120~160g/L 정도지만, TBA로 가면 240g/L를 넘는 것이 즐비하고 토카이 에센시아는 450g/L를 넘는다.
이런 종류의 스위트 와인은 식후 디저트로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샤토 디켐의 경우 자신들의 와인이 후식정도로만 소비된다는 얘기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저명한 와인평론가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메인 디쉬에 샤토 디켐을 내놓고 식후에 샤토 라피트 로쉴드를 내놓았다는 일화도 있다.
귀부화의 드묾
귀부화에 필요한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가 특정한 기후 조건이 아니면 대규모로 포도밭을 습격하는 일이 없다. 대규모로 발생하더라도 적합한 기후가 아니면 포도가 그대로 썩어버리고, 또 특정한 포도 품종이 아니면 제대로 번지지도 않는다.
귀부화를 유도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후 조건은 밤과 새벽에는 안개가 끼며 습도가 높아 곰팡이의 성장이 촉진되는 장소다. 하지만 계속 습기가 차 있으면 포도는 그대로 썩기만 할 뿐이기 때문에 오후에는 산산한 바람도 불고, 태양빛을 받아 포도가 마르면서 수분이 증발하고, 또 곰팡이의 성장도 억제해줘야 한다.
곰팡이에 습격받은 포도송이도 곰팡이가 포도 전체에 번지려면 포도송이들이 가깝게 밀집되어있고, 껍질이 얇은 품종이 좋기 때문에 쇼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세미용(Semillon) 같은 품종들이 사용된다. 이런 제한 때문에 귀부 와인 생산에 맞는 지역을 찾는 건 무지 힘들어서 새로운 생산지를 개척하는 건 많이 힘들다. 그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실험관 귀부 와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수확의 어려움
농축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강한 포도는 피하고, 대신 곰팡이가 피고, 쭈글쭈글하게 말라버린 포도알만을 골라내서 수확해야만 한다.
포도의 귀부화는 한 포도송이 내에서도 일정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포도알의 한 쪽 부분은 완전히 정상적인 상태이고, 반대 부분은 완전히 귀부화되는 경우가 매우 대부분이다. 때문에 포도송이를 통째로 잘라내어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부위별로 포도알을 알알이 골라 수확해야 한다.
그리고 수확을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귀부균의 진행 상황에 맞춰 몇 번에 걸쳐서 수확하게 되므로 인건비가 많이 들어간다.
웬만한 고급 와인이라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인력으로 손수확하는게 당연시되고 있지만 귀부 와인의 경우는 그것보다 몇 배나 더 수고가 든다. 일반 와인은 상당한 고급 와인이라도 수확은 1~2회 정도로 끝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귀부 와인의 최고봉인 샤토 디켐 같은 곳은 보통 6~7번 정도에 걸쳐 수확을 진행한다. 빈티지에 따라서는 10~13번에 걸쳐 수확하기도 한다. 여기에 투입되는 노동력은 당연히 와인의 원가에도 반영된다.
최근에는 이미지 인식 머신 러닝과 로봇 기술을 이용하여 과실의 상태를 개별적으로 분류한 후 잘 익은 알만을 골라 수확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관련영상 그러나 아직 사람에 비해서 수확 속도가 빠르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 대를 투입하려면 장비값을 감당하기에 쉽지 않을 것이다.
와인 생산지는 평지가 아닌 비탈진 구릉지대가 대부분이라는 점도 로봇 투입이 어려운 요소. 반면 로봇은 사람과 달리 밤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기술을 개량해서 지형 적응력과 수확 속도를 올리고 로봇 값을 더 낮출 수 있다면 앞으로는 와인용 포도 수확 현장에서 로봇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은 생산량
까다로운 기후적 조건으로 인해 넓은 재배지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단위 면적당 소출(yield)도 적다. 귀부화가 잘 진행된 포도알만 골라 만드므로 양이 줄어들고, 거기에 수분이 증발되어 건조된 포도로 만들기 때문에 또다시 양이 줄어든다. 단위 면적당 소출은 그랑 크뤼급 와인들이 1 헥타아르당 35~45 헥토리터 정도지만 귀부 와인은 보통 18 헥토리터 이하가 된다.
소테른 지방의 그랑 크뤼 샤토들의 소출은 15헥토리터 전후이며, 그중에서 특 1등급인 샤토 디켐은 8 헥토리터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엄격하게 포도를 선별하여 수확한다. 샤토 디켐은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한 잔의 와인이 나온다'라고 말할 정도다.
생산지 및 종류
세계적으로 유명한 귀부 와인이라고 하면 보통 아래의 3가지를 말한다.
물론 이 세 가지만이 귀부 와인인것은 아니고, 프랑스의 다른 지방이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4], 체코, 미국,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지지만 오랜 역사와 명성을 쌓은 곳은 이 세 가지 정도이다.
프랑스의 소테른/바르삭(Sauternes/Barsac)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귀부와인 산지. 1855년에 나폴레옹 3세의 명에 의해 도입된 그랑크뤼 클라쎄(Grand Cru Classé)라는 등급제가 도입되어 있다.
이 등급제에서는 27개의 우수 생산자를 특1등급(1개), 1등급(11개), 2등급(15개)으로 분류했다. 물론 등급자체를 받지 못한 생산자들도 많이 있다.
이 지역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와인이 유일한 특1등급인 샤토 디켐(Château d'Yquem)이다. 그 외에 1등급의 쉬뒤로(Suduiraut), 리외섹(Rieussec), 기로(Guiraud), 클리망(Climens) 등이 유명하다. 비등급 샤토 중에서는 샤토 드 파르그(de Fargue), 질레트(Gillette), 레몽 라퐁(Raymond-Lafon) 등이 고품질을 낸다.
세미용(Sémillon) 품종 80% +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품종 20%가 가장 일반적인 소테른 블렌딩. 세부 블렌딩 비율은 생산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샤토 클리망(Climens)은 세미용 100%를 사용하며, 샤토 기로(Guiraud)는 소비뇽 블랑이 30~35% 정도까지 늘어난다. 귀부화 작용에 의해 포도를 반건조시키는 것뿐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한 알 한 알 선별하기 때문에 품질이 매우 좋을 수밖에 없다.
독일의 트로켄베어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
약어로 TBA라고 한다. trocken은 dry, beeren은 berry, auslese는 pick의 뜻이다. 즉 영어로는 selected harvest of dried berry, 귀부화에 의해 마른 포도알을 솎아내어 수확했다는 뜻이다.
다른 두 지역은 귀부 발생 지역이 강을 끼어서 귀부 발생에 이상적인 특정 지역으로 집중되어 있는반면, 독일의 귀부 발생지역은 독일 포도밭의 특성 때문에 해마다 기후에 따라 생길 수도, 안 생길 수도 있다. 따라서 독일의 귀부 와인은 타 지역에 비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크며, 대부분의 양조자들도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 보단 거의 취미생활의 일환, 본인과 양조장의 명성을 위해 만드는 것에 가깝다.
헝가리의 토카이(Tokaji)
헝가리 토카이 지방의 귀부 와인은 당도에 따른 등급체계가 있다. 푸토뇨쉬(Puttonyos)라는 단위의 등급 기준이 있으며 3푸토뇨쉬부터 시작하여 6푸토뇨쉬까지 있다. 6푸토뇨쉬보다 높은 등급도 존재하며 가장 높은 등급인 에센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당도가 높은 와인이다.
에센시아(Essencia)[7]는 이미 와인이 아니라 고농축 포도과즙 알코올 시럽에 가깝다. 최소 450g/L이상, 특별히 좋았던 빈티지의 특수한 제품은 800g/L 이상의 당도를 내는 것도 있다. 마냥 농담이 아닌 것이 이렇게 당도가 높으면 진짜 시럽이나 물약처럼 스푼에 따라서 먹기도 한다.
에센시아는 너무나도 당도가 높아 효모가 활동하기 어려워서 발효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더라도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에센시아는 나무통이 아닌 유리 단지에서 발효/숙성시키는데, 일반 와인의 알코올 발효는 몇 주면 끝나는 것에 반해 5~6년을 발효시켜도 알코올 도수는 불과 2~3%밖에 되지 않으며, 일부 빈티지의 경우 도수 1.5% 정도로 법적으로 술로 분류되는 도수 1%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수준이다.
에센시아는 당도뿐 아니라 산도 또한 어마어마해서, 타르타르산(tartaric acid) 함량도 신 맛 드라이 화이트 와인의 3~4배를 넘는 15~20g/L에 이른다. 당도만 높으면 금방 물리지만 높은 산도 덕분에 먹을 만하다는 듯.
프랑스의 기타 생산지
프랑스 내에서의 귀부와인 생산지를 보면, 앞서 기술한 소테른(Sauternes), 바르삭(Barsac) 지역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의 생산지역도 다수 있다.
우선, 소테른/바르삭 바로 왼편에 인접한 그라브(Graves) 지구에서는 드라이 와인을 주로 생산하고 있으나, 소테른과 유사한 스타일의 스위트 와인도 일부 생산되고 있다. 소테른/바르삭의 강 건너편에 위치한 생트-크르와-뒤-몽(Sainte-Croix-du-Mont), 루피악(Loupiac), 카디약(Cadillac) 지구에서도 유사한 기후적 특징으로 인해 귀부 와인을 많이 생산한다. 상기 생산지들은 모두 보르도에 속하며, 보르도보다 더 남쪽에 있는 몽바지악(Montbazillac) 지구 등에서도 귀부와인을 만들고 있다.
동북부의 독일 국경지역인 알자스(Alsace)지방에서는 리슬링(Riesling), 게뷔르츠트라미너(Gewürztraminer), 등 독일계통 품종과 피노 그리(Pinot Gris) 품종으로 귀부와인을 만들며, 르와르(Loire) 지방의 본조(Bonnezeaux), 코토 뒤 레용(Coteaux du Layon), 코토 드 로방스(Coteaux de l'Aubance) 지구에서는 슈냉 블랑(Chenin Blanc) 품종으로 귀부와인을 생산한다. 알자스와 르와르 지방의 귀부 와인은 셀렉시옹 드 그랑 노블(Selection de Grain Noble)[9]이라 하여 귀부 와인을 만든다.
요리와의 매칭
메인 디쉬로 어울릴 요리로는 거위 지방간 요리인 푸아그라가 귀부 와인과 찰떡 궁합을 이룬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귀부 와인에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다.
소테른은 알콜이 일반 와인과 마찬가지 수준(12~14%)으로 높고, 그럭저럭 많은 당분(120~150g/L)에 산도는 일반 와인에 비해 약간 높다 (4~6g/L) 이런 조건이 푸아그라와의 매칭에 최적 조건이다.
TBA는 알콜이 낮고 (6~7%), 당도는 매우 높으며(200g/L 이상), 산도가 높다(8~9g/L). 이런 조건은 푸아그라와 그리 잘 맞지 않는다. 푸아그라와 마실 것이라면 프랑스산 소테른이나 그 인근 지방의 귀부 와인을 고르거나, 토카이 5~6푸토뇨쉬 정도의 일반 제품을 고르는 것이 좋다.
토카이 6푸토뇨쉬 중 1류 양조장의 싱글 빈야드(Single Vineyard, 단일 포도원) 제품은 더 상위 등급(아쑤 에센시아)의 기준을 넘는 당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많아 푸와그라와의 매칭에서는 추천하고 싶지 않으며 이런 고급 토카이는 요리와 무리하게 매칭하기보다는 디저트로써 단독으로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
스위트 와인의 서빙은 차게 서빙한다는 것이 일반론이지만, 이것도 귀부 와인 종류에 따라 적정 온도가 다르다. 산도가 낮고 알콜이 높은 스타일은 높은 온도에서, 산도가 높고 알코올이 낮은 스타일은 낮은 온도에서 서빙한다. 소테른은 너무 차게 하면 향이 잘 살지 않고 특유의 매끄러운 질감이 무뎌진다.
고급 소테른은 10~12도 정도로 서빙하는 것이 좋다. 반면 산도와 당도가 모두 높지만 알콜은 낮은 고급 TBA는 높은 온도에서 서빙하면 산도와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에 7~8도 정도로 서빙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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